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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대 초기, 동양적 맥락에서의 '종속국'과 '식민지' 그리고 '자주 독립'에 관하여 -시암과 청 제국-
    카테고리 없음 2022. 8. 21. 00:00

    동아시아에서는 조선을 '속국(Vassal State)' 또는 '종속국(Dependent State)'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주장이 통념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그중 한국에서는 모종의 역사적 맥락에 따라 그런 통념이 아주 굳게 뿌리내리고 있다. 그것을 요약하자면, 동양의 '조공국(Tributary State)'과 서양의 '근대적 속국'이 완전히 다른 개념으로, 때문에 1880년대 이래 청 제국이 조공국 조선을 '종속국'으로 규정한 것은 역사적 사실의 왜곡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관련 자료를 탐색해보면서 '속국(Vassal State)', '종속국(Dependency)', '조공국(Tributary State)' 등이 등가관계에 있는 개념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세기 이래 서양인들은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 등지에서 동양의 종속 관계를 두고 혼란을 겪었다는 사실이 분명하기 때문에 왜 그러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동양(전근대)과 서양(근대)의 종속 관계가 다르다는 이항대립적 전제로 그것을 서양인들의 무지나 오해로 치부하는 데에 동의할 수 없다. 역으로 당시에 동양과 서양의 텍스트가 서로를 완전히 납득시킬 수 있었다고 보지도 않는다. 서양인들의 혼란은 종속관계의 차이보다는 '독립(Independence)'과 '자주(Sovereignty)' 그리고 '자치(Autonomy)' 등 정치적 자율성에 관한 개념의 유무나, 종속 관계에 대한 번역에서의 '가상적 등가성'이 초래한 상상에서 기인한 것이 컸다.

    I. 동양적 맥락에서 '평등주권'과 '완전한 독립'의 부재


    1882년 10월, 제3차 수신사로 파견된 김옥균은 영국 측과 조영수호통상조약 비준을 논의하면서 주일영국공사 해리 파크스(H. S. Parkes)에게 당시 흥성대원군의 압송과 외교 등에 개입하는 청국의 행위가 국제법적으로 타당한지 질의하였다. 이 면담에서 파크스는 "국제법은 독립국들의 관계에 있어서 충분히 명확했지만, 종속국들은 각 경우의 상황에 따라 관할하였고, 종속성의 정도는 거의 모든 경우에 따라 달랐다. 그러므로 중국이 조선에 간여할 권리는 그 종주권의 조건에 달려 있다.(International law was clear enough in regard to the relations of independent States, but those of dependent States were governed by the circumstances of each case, and the degree of dependence varied in almost every instance. The right of China to interfere in Corea must therefore depend upon the conditions of her suzerainty. If her interference were limited to the restoration of order, she would have done Corea some service)"고 답변했다. 파크스의 말처럼 종속관계는 위계적, 계서적, 종속적인 지위를 성문화한 관계를 모두 포괄하는 형식논리로, 그 본질은 경우에 따라 다른데다가 하나의 경우에도 탄력적이고 가변적이었다. 파크스에 따르면 국제법 체계에서 '독립국(Independent State)'이라는 정의는 보다 분명했다. 다르게 말하면 '평등주권(Westphalian sovereignty)'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물론 국제법 하의 국제질서도 주권평등원칙과 별개로 실질적으로는 권력적 측면이 내재되어있고, 실제로 비대칭적이고 불평등한 위계질서로 운영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이러한 국제법적 장치는 주권 국가의 상부적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에, 현대에는 상대국에게 아주 당연하게 '내정 불간섭의 원칙(Non-interventionism)'을 호소할 수 있다.(물론 19세기 식민체제에서 비유럽 국가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그러나 칭신봉표(稱臣奉表), 입조(入朝), 납공(納貢), 책봉(冊封), 영봉(領封) 등을 통해 종속관계를 성문화한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에서 '독립(Independence)'에 해당하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가 다원화되거나 혼란할 때 중국에서 서로 대등한 왕조들이 출현하거나, 간혹 중국과 대등의식을 표방한 정치체가 나타나기도 했지만, 그것을 완전(full)' 내지 '절대적(absolutely)' '자주·독립(Sovereign·Independent)'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하는 형식논리는 부재했다. 즉,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서구에서는 주권평등과 종속 관계라는 두 형식논리가 공존했지만, 20세기 초 종말을 고한 청 제국과 조선의 관계에서는 후자만 있었을 뿐이다.

    19세기 초부터 영국과 프랑스 등이 동남아시아에 진출하면서 시암, 버마, 베트남, 청 제국과 인근 군소국가 간의 다원적 종속 관계를 해석하는 데 있어 고심하거나, 아편전쟁 이후 동아시아의 일원적 종속 관계를 두고 혼란을 빚은 것은, 동서양의 '종속' 개념의 차이가 아니라 '독립' 개념의 부재에서 연원한 것이다. '독립' 개념의 유무는 자연스럽게 양자간에 종속 관계에 대한 해석 차이를 야기할 수 밖에 없었다. 먼저 동남아시아의 사례를 살펴보자면, 말레이 반도의 크다는 시암에 '속방(ข้า ขอบ ขัณฑสีมา)'을 청하여 '완전한 충성(ทวาย สวามิภักดิ์)'을 맹세한 속국(ประเทศราช) 중 하나였으나, 1780~1820년대 버마-시암 전쟁과 시암의 왕조 교체 가운데 시암의 종주권 강화에 반발하여 영국 동인도회사에 피낭 일대를 양여하고 보호를 요청했다. 그러나 1820년 술탄 아흐맛 타주딘 할림 샤 2세가 버마와 연대하여 시암을 적대하고 붕아 마스(بوڠا مس, บุหงามาศ)를 비롯한 납공을 중단했다. 크다 군주들은 영국에게 보호를 요청하면서 붕아 마스는 어디까지나 관계를 취소할 수 있는 약소국이 바치는 단순한 존경의 표시라고 호소했으나, 1821년 시암이 크다를 침공하고 크다 군주가 도주하고 폐위되는 상황에서 영국은 논쟁 끝에 크다의 요청을 거부하고 피낭 양도에 대한 시암의 의중을 살피기 바빴다. 이때 영국은 크다가 독립국이 아니라 종속국일 경우 1787년과 1802년 크다 술탄들로부터 양도받은 피낭 점령 문제에 시암이 간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말레이 라자들이 방콕의 시암 조정에 납공한 '붕아 마스'는 금과 은을 이용해 나무의 모습을 형상화한 공물이었다.

    그래서 일부 영국인들은 1826년 시암이 페락을 침공했을 때부터 그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말레이 국가들의 붕아 마스 의례를 시암 조정에 대한 복속의 증표라는 것을 부정해야했다. 피낭(웨일즈)의 제임스 로(James Low) 중위는 동인도회사의 승인없이 술탄 압둘라 무아잠 샤와 페락의 독립을 선언하는 협정을 체결했다. 페락은 독립을 영국에 대한 다중복종으로 해석하여 시암군을 몰아내고 페락과 시암은 페락이 양자간의 종속관계가 변함없다고 보았다. 그런데 웨일즈 정부 당국은 이 소식을 접하고 페락에 대한 보호 의무가 없다는 견해를 밝혔다.

    한편 프랑스는 1863년 캄보디아의 노로돔으로부터 보호국화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때 시암 조정은 항의했으나, 프랑스 측은 캄보디아가 '자주·독립(Sovereign·Independent)' 국가라는 점을 내세워 캄보디아가 코친차이나와 조약을 체결하는 것은 하등 문제 없다고 답변했다. 프랑스는 영국이 자신들의 견해와 별개로 시암의 비위를 맞춰주면서 기존의 종속관계에 불간섭한 것과 달리 캄보디아가 시암에 공납하는 것을 방임하면서도 그것을 사실상 무시한 채 '독립(Independence)'이라는 개념을 활용하여 캄보디아를 피보호국화하고 있었다. 반면 '평등주권'과 '독립'이라는 형식논리가 부재했던 시암 조정은 프랑스의 피보호국화를 어디까지나 과거부터 이어져 온 공동보호 내지 다중복종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그것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고, 1867년 7월 마침내 파리에서 시암 사절로부터 캄보디아에 대한 종주권의 포기를 이끌어 냈다.


    이제 동아시아의 사례를 살펴보자. 1840년대 류큐와 조선은 영국과 프랑스의 함선들로부터 종종 통상을 요구받았다. 1845년 영국의 사마랑호(H.M.S Samarang)가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자, 조선은 예부 자문을 보내어 조선이 청 제국의 번복(藩服)임을 상기하면서 자국을 '금단지도(禁斷之道)'의 비호를 입고자 하였다. 이것은 남경조약과 황포조약 등으로 5곳을 개항하는 대신 다른 항구로 가서 통상을 요구할 수 없다는 합의를 가르키는 것이었다. 이에 도광제는 영국 측에 일체의 장정을 마땅히 준수해야한다고 강조하면서 천조의 속국에 통상을 요구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 청 제국은 류큐와 조선을 제국의 보호를 받는 종속국으로 유지하고자 그들의 요청에 따라 영국과 프랑스를 저지하고자 한 것이다. 물론 청조는 현실적인 여건에 따라 조약의 범주에 류큐와 조선과의 종속관계를 포함시켜 프랑스와 영국을 설득할 수 밖에 없었다.

    청조가 황포조약에 속국을 포함시켜 프랑스인들을 제어하자, 프랑스 측은 통상과 선교라는 목적을 감추는 대신 조약에 저촉되지 않으며 동시에 정당화할 수 있는 상선 보호의 명분을 내걸었다. 게다가 류큐에 대해서는 영국인들이 류큐가 사쓰마번의 종속국에 다름없다는 점을 이용해 청 제국의 종속국이라는 주장 자체에 시비를 걸고 있었다. 이제 제국의 권도가 실현가능성이 없음에도, 그러한 조회(照會)를 보내는 것은 청 제국이 기미하는 데 있어 종주권을 업심당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는 것에 불과했다. 1857년까지 류큐는 북경 조정에 영국인들의 제어를 수차례에 걸쳐 요청했지만, 청조는 이를 무시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제2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천진조약이 체결되면서, 청조는 서양인이 청 제국에서 통상 및 선교를 허용하였다. 1860년대 프랑스인들은 마침내 조선에 대해 선교와 통상 활동을 시도하기 이르렀다. 1865년 프랑스 측은 청조에 조선 선교를 위한 노조(路照)의 발급과 조선에 이 사실을 통지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는 곧 천진조약의 범주에 조선이 포함되느냐는 문의였다. 그러나 총리아문은 조선이 청 제국과 종속 관계를 맺고 있지만, "해국(該國)이 봉교(奉敎)를 원하는 여부를 중국이 강요할 수 없다(所有該國願否奉敎 非中國所能勉强)"고 거절했다.

    1866년 7월, 프랑스의 대리공사 벨로네(H. de Bellonné)는 본국의 재가없이 병인박해를 두고 조선 원정을 천명하면서 공친왕에게 조회를 보냈다. 그는 프랑스 정부의 허가를 사칭하는 한편, "중국 정부는 나에게 여러 번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습니다. 중국 정부는 조선에 대하여 어떠한 권위나 권력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u’il n’avait aucun droit, aucune puissance sur la Corée, Le Gouvernement Chinois m’a déclaré à plusieurs reprises qu’il n’avait aucun droit, aucune puissance sur la Corée et s’est couvert de ce prétexte pour refuser d’appliquer à ce pays les traités de Tien-Tsin et de donner à nos missionnaires les passe-ports que nous lui demandions)"라고 통보했다. 이것은 벨로네가 청 제국의 종주권을 노골적으로 부정한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9월 극동 함대 사령관이었던 로즈(G. Roze)가 벨로네에게 말한 것과 같이 공친왕의 직접적인 선언[le prince Kong l’a déclaré lui-même]을 통해 이제 "조선은 새로운 독립국(indépendant)으로, 중국과 속국 관계는 없는 것이 확실하다(La Corée est un pays tout à fait neuf et indépendant. Il est certain qu’il n’existe plus entr’elle et la Chine aucun lien de vasselage)"고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벨로네가 공친왕에게 보낸 조회는 그 스스로가 "고려왕국은 이전부터 중화제국의 속국(de Vassalité rattachaient autrefois à l’Empire de la Chine)"으로 추정했기 때문에 청 측에 전달한 것인데다가, 한역으로는 과거형도 아니었다. 아울러 벨로네의 핵심적인 선언은 "조선은 중국에 납공하지만 일체의 국사는 자주(自主)해왔으며, 따라서 천진조약에도 기입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제 본국은 조선과 전쟁을 벌이려 하지만, 중국은 또한 간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와 원래 서로 간섭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高麗於中國納貢 一切國事 皆其自主 故天津和約 亦未載入 玆當本國於高麗交兵 自然中國亦不能過問 因與彼國原不相干涉也)"라고 한역되었기 때문에 청조 입장에서는 종속관계의 부정 내지 폐지로 읽히지 않았다.

    프랑스인들은 공친왕의 거절을 '독립(Independence)'으로 전유하였지만, 그것이 다시 한역되는 과정에서 '독립(Independence)'은 속국의 정치적 자율성으로 환원된 셈이다. 그들에게 '자주'란 '독립'이 아니라 "자기생각대로 행하여 자기행동이 다른 사람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것", 즉 '자주자(自主者)'라는 전통적인 의미에 불과했다. 이는 1860년대 선교사 월리엄 마틴(William A. P. Martin)이 '자주자'를 '자주·독립국(sovereign and independent
    States)'의 번역어로 채택한 데서도 드러난다. 공친왕은 조선이 중국의 납공지방(納貢之邦, tributaires)이기 때문에 거중조정(從中排解, mediation)을 제안하고 병인박해의 진상을 조사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벨로네 측은 무시로 일관하였고, 청조는 예부로 하여금 조선에 불개입 의사와 함께 프랑스의 동향을 알려주거나 화친을 제안하였다. 당년 11월, 벨로네가 공친왕에게 조회를 보내어 청조가 중립이 아니라 조선을 비호하고 있다고 비난하자, 공친왕은 벨로네에게 답신을 보내어 조선과 북경 조정이 사신을 주고 받는 것은 최근의 일이 아니라 고래(古來)의 법에서 유래한 의례라고 항변했다. 그는 그러면서 병인양요가 결코 '조공체계'를 수정하거나 폐지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이것은 공친왕이 벨로네에게 수세에 몰리고 있다는 증거였지만, 동시에 청조가 조선이 종속국이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병인양요에 대한 개입을 별도의 사안으로 인지했다는 반증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병인양요의 발발 직후 프랑스 외무부는 조선이 중국의 '속국(vassal)' 여부에 관한 공식적인 유보하면서 철병을 지시하는 한편, 벨로네의 개인적 추론에 근거한 선언을 무효화 했다. 이후 벨로네(Bellonet)의 귀국 후 후임으로 온 주청 프랑스 공사 랄르망(Lallemand)은 청조의 '종주권(le suzerain)'과 조선의 '종속국(dépendante)' 지위를 인정했다.

    1876년 3월 말, 주일영국공사 파크스는 조일수호조규에 대해 본국에 보고하면서 제1조의 '자주지방(自主之邦)'을 '독립(Independence)'으로 해석했다. 그는 그 조관을 "조선이 중국으로부터 독립(Corea is independent of China)"했다고 해석했는데, 이 또한 동양적 맥락에서의 정치적 자율성을 오독한 것이었다. 물론 동양적 맥락에서 종속 관계를 전제하면서도 국가성을 전제하는 것은 서구적 맥락에서도 이해될 수 있었다. 국제법에서도 '자치국(Autonomous State)', '반주국(Semi-Sovereign State)', '진공국(Tributary State)', '속국(Vassal State)', '종속국(Dependent State)' 등의 개념은 해당 정치체들의 종속관계와 더불어 그들의 독립 및 자주성(independent sovereign power)을 전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은 1880년대 조약 과정에서 조선의 독립·자주성(independent sovereign power)을 상정하여 피차 간의 '주권평등'을 선언하면서도, 조선에 대한 청조의 종주권을 비공식적으로 인정하거나 아예 활용할 것을 추동하기도 한 것이다.¹

    조일수호조규의 당사국이었던 일본 측은 동서양의 개념을 아울러 이해하고 그 취약성을 적극적으로 공략함으로써 훗날 조선의 완전무결한 '자주·독립(Sovereign·Independent)'을 선언했다. 그러나 일본이 청일전쟁 직전까지 "조선국의 독립과 자주의 비기를 기대(又期以朝鮮國獨立自主丕基)"했는지는 몰라도, 조일수호조규 체결 당시 일본 측 최고 실무자 중 한 명인 미야모토 오카즈(宮本小一)는 1869년, 자신의 《조선론(朝鮮論)》에서는 "조선은 반독립국(半獨立國)이므로 서양과 조약을 체결할 수 있는 체제가 없고, 또 조약 체결에는 많은 경비가 든다"고 하였으며, 1876년 1월, 모리 아리노리(森有禮)와 총리아문은 조선 문제를 두고 교섭하였는데, 이때 모리는 "조선국이 독립국의 실이 있다고는 하나 청국 속관(屬管)의 명을 무릅쓰고 칭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세르비아(セルウヰヤ) 등이 오스만국(土耳格國)에 묶인 것과 같이 온전한 다른 독립국들 처럼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일본은 단지 총리아문의 심계분(沈桂芬)이 청조가 조선의 대외 관계를 자주에 맞긴다는 의사를 표명한 데서 조약 체결의 근거를 찾았을 뿐이다. 게다가 이홍장은 보다 분명하게 '소속방토'의 "방(邦) 자는 고려(조선) 등 종속국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못 박았다.²

    II. '독립'의 인지와 '가상적 등가성'이라는 상상의 상호작용


    조청 종속 관계의 당사자들도 1880년대에 이르면, '만국병립(萬國竝立)'의 시세에 상황적응적 혹은 임기응변적으로 대응하는 차원을 넘어, 적극적인 대응과 관계 재편을 기도했다. '독립'과 '자주' 등 국제법 체계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청조의 외교 관료들은 '독립(Independence)'의 개념을 보다 선명하게 이해하고 위기에 대응하고자 했다. 1888년 이홍장은 이를 "중국의 번속은 나름의 체제가 있고 한계가 있어 원래 태서(서양)의 사례와 큰 차이 있었는데, 근자에는 그것이 동방의 대세에 관계되어 조금이라도 대안을 모색하지 않고 번속의 계책을 스스로 고수하지 않을 수 없다(中國之於藩屬 有體制 有界 限 原與泰西事例迴殊 近知其為東方大局所關 不能不稍稍代謀 以為自固藩禽之計)"고 해설했다.

    19세기 중반에 편찬된 《국제법 원리, 국제법학사 개요 첨부(Elements of intenational law with a Sketch of the History of the Science)》 단계에서 종속국(Dependent state), 반주국(Semi-Sovereign State) 등으로 혼재하던 속국(Vassal State)과 보호를 받던 정치체들이 19세기 후반부터 각각 '속국(Vassal State)'과 '보호국(States under Protectorate)'으로 명확히 분리되고 전자는 구시대적인 것으로, 후자는 '병합' 내지 '식민지'로 전환되는 새로운 국제질서에서, 이들에게 '조공책봉관계'로 성립한 탄력적이고 가변적인 종속 관계는 서양의 추세대로면 '합병'이 아니라 '독립'해야할 수도 있는 취약한 것이었다. 《문명국들의 근대 국제법(Das moderne Volkerrecht der Civilisierten Staten》의 서술을 빌리자면, "속국(vasallenstaten)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완전한 주권 국가(vollsouveränen Staten)로 격상하여, 종주권은 점차 더 유명무실화 되어 무력해지거나, 종주국(oberherrliche Stat)은 부여된 주권을 철회하고 병합한다(Entweder erheben sich im Laufe der Zeit die Vasallenstaten zu vollsouveränen Staten, indem die Ober herrlichkeit immer mehr zur blossen Form und ohumächtig wird, oder der oberherrliche Stat zieht hinwieder die verliehenen Hoheits rechte an sich und einverleibt sich den Vasallenstat)"는 것이다.

    조선이 위태로우면 중국의 형세도 날로 급박해집니다. 그러므로 중국의 오늘날 형세를 논하자면, 몽골이나 서장(西藏: 티베트)의 예처럼 조선에 주차판사대신(駐劄辦事大臣)을 두고 모든 국내의 정치 및 외국과의 조약을 모두 중국이 주지함으로써 외국인들이 감히 엿보지 못하도록 하는 것, 이것이 상책입니다. 다만 지금은 일이 많고 채찍의 길이가 미치지 못하듯이 역량이 부족하여 이 대책을 진실로 시행할 수 없으니, 부득이하게 그다음 방안을 생각해야 합니다. 러시아가 혼자 차지하려는 형세를 막고 천하(天下)의 만국(萬國)과 서로 고르게 하여 유지하도록, 조선으로 하여금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와 통상하도록 하는 것이 좋은 방책입니다. 몇 년 동안 우리 총리아문과 남양 및 북양대이 힘을 합쳐 같은 마음으로 함께 이러한 일을 도모하였지만, 조선은 동쪽 모퉁이에 치우쳐 있어 풍기가 얽매여 있기에 전혀 우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아 어찌 해볼 방법이 없었습니다. 오늘에 이르러 형세가 위급해지자 조선은 완전히 방향을 바꾸게 되었는데, 이것은 어찌 하늘이 그 속마음을 인도하여 조선을 위해 위급존망의 전기로 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제가 일찍이 조사해 보니 서양의 속국은 모두 그 정치를 (통할지국)이 주지하니, 매 "아시아의 공헌지국(貢獻之國)은 속토(屬土)로 논할 수 없다"고 합니다. 또한 서양의 통례를 살펴보면, 속국·반주지국(屬國 半主之國)이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을 때에는 대부분 통할지국(統轄之國)이 그것을 주정(主政)합니다. 또한 서양의 통례를 살펴보면 두 나라가 전쟁을 할 때 다른 나라는 그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고 한 쪽을 도울 수 없지만 속국만은 예외입니다. 지금 조선을 러시아가 삼키려하는 위급함에서 구하려면, 부득불 다른 나라의 힘을 빌려 서로 버틸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조선이 스스로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게 하면 다른 나라들은 모두 조선을 자주(自主)라 일컬어 중국의 속국(屬國)이라는 이름은 홀연히 사라질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일시적으로 다급한 일을 구하자고 근심을 뒷날까지 남기게 되니, 역시 이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그래서 다시 만국공법(萬國公法)을 두루 살폈는데, 도이치 연방(德意志聯邦)은 종래 각자 입약지권(立約之權)을 가지고 있었으니, 지금 중국이 조선에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는 것을 허락하여도 원래 안 될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마땅히 조정에서 회의를 하여 속히 유능하고 숙련되고 총명하여 외교의 이해(利害)를 알 수 있는 사람을 조선에 파견하여 대신 조약 체결을 주지하게 하도록 청한다면, 속국의 명분은 이로 인해 더욱 분명해질 것이고, 나중에 혹시 외국과 문제가 생기더라도 우리가 조종한다면 충분히 북양의 거점을 공고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아주 좋은 방책입니다. 혹시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마땅히 총리아문을 통해 유지(諭旨)를 주청하여 조선국왕에게 지시를 내려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고, 조약 앞부분에 "중국 정부의 명을 받들어 모모 국가와 조약을 체결하기를 원한다"고 밝히게 한다면, 대의가 분명해지고 병번(屏藩: 조선)도 저절로 굳건해질 것입니다.

    何如璋,〈主持朝鮮外交議〉, 국역 《淸季中日韓關係史料》3, pp. 86-102.

    1880년께, 주일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은 서양의 속국들은 모두 그 정치를 통할지국(統轄之國)이 주지하는 반면, 아시아의 공헌지국(貢獻之國)은 속토(屬土)로 논할 수 없다는 공격에 대한 대응을 주문했다. '속토(屬土)'의 용례는 사실 찾기 어렵지만, 《국제법 원리, 국제법학사 개요 첨부》(만국공법) 및 《국제법학개론(Introduction to the Study of International Law)》(공법편람)의 한역본에서 '영토(Domain; Territory)', '점유(Possessions)', '식민지(Colony)', '주(Province)' 등은 '속지(屬地), '속부(屬部)', '성부(省部)'로 한역되어 '단일 주권적' 관계를 한역하는 번역어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속국(Vassal State)이나 종속국(Dependent State), 봉건적 종속국(Feudal Dependence) 등의 번역어로 채택된 '속방(屬邦)', '속국(屬國)', '속번(屬藩)' 등도 이 '단일 주권적' 개념들을 번역할 때 채택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서양의 개념을 번역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중국어 단어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두 언어 사이에서 '중간지대'가 창출되고, 서로 다른 개념의 차이를 약화시키는 '가상적 등가 관계(hypothetical equivalences)'가 형성된 것이었다. 하여장이 보기에 서양의 속국은 통상 정치와 외교를 통할지국이 주관한다고 한 것에서 미루어 보건대, 그가 거론한 '속토' 또한 중국과 유럽 컨텍스트 간의 '중간지대'에서 창출된 가상적인 동의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다른 부분에서는 하여장은 보다 명백하게 가상적 등가 관계를 설정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조선의 '번부화'를 제안하면서 임시 방편으로 독일 연방(German Confederation)의 사례를 모방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연방정부와 영방국의 관계를 종속 관계로 간주하여 독일의 연방정부는 '상국(上國)'으로, 맹방(盟邦)들은 '속국' 또는 '속방' 등을 가상적인 동의어로 번역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고 있는 독일 연방은 '상국-속국'이라는 위계적 관계가 아니라 맹주를 두고 있는 평등한 자주국들의 연합에 불과했으며, 이후 독일 제국 시기에는 연방정부가 영방국들의 외교권을 제한하고 있었다. 하여장의 의견은 러시아의 남하라는 안보 위기 가운데, 과거 정일창(丁日昌)이 제안한 입약권도책을 지속하는 한편 조선의 종속국 지위를 국제법적으로 설명하고자 한 데서 나온 방책이었다. 그도 내심 독일 연방과 '조공책봉관계'의 가상적 등가 관계의 한계를 인지했는지,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조선이 조약을 체결하는 데 있어 "중국 정부의 명을 받든다"는 문구를 삽입할 것을 제안했다. 한편 하여장의 후임 여서창(黎庶昌)은 임오군란 수습 과정에서 일본이 조청 종속 관계를 원천 부정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자, 상책으로 영국령 인도처럼 조선국왕을 폐위하고 조선을 합병하거나, 하책으로는 독일이 게르만 열국을 대하는 사례를 모방해 조선의 자주(自主)의 명분 자체를 몰수하고 조선의 외교를 청조가 주관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 외에도 서양인과의 접촉이 잦았던 양무파 외교 관료들은 독일 연방, 영국령 인도 및 아프가니스탄, 벨기에와 스위스의 공동보호 사례 등을 참조하였다. 이들에 의해 유럽의 종속 관계들과 청조의 종속 관계의 가상적 등가성이 성립되어 조선과 청조 간의 '조공책봉관계'는 부분적으로 변용되었다.(통념에서는 '변질'로 평가된다) 이는 종속 정치체들의 애매모호한 주권이 '국제법적 피보호국화' 또는 '합병', 반대로 '독립'되고 국제정세와 그 추세에서 전자가 속국의, 후자는 자주지국의 '태서사례(泰西事例)'로 일반화돼 제국이 대책을 강구한 결과였다. 이 복잡하고 유기적인 양상에서 청말 중국인들의 상상 속 서양의 '소유속국(所有屬國)'은 구체적으로 "중국의 행성과 같아서 왕위를 폐지할 뿐만 아니라 대국의 주지(主持), 즉 그 평상시의 전량, 세금을 대국이 파견한 관리들이 검토한다 ... 속국은 조금도 자전(自專)하지 말고 대국의 재제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不啻中國之行省 不但王位之廢立 皆大國為之主持 即其平日之錢糧 稅項 亦皆由大國派官以為之 …… 屬國均不得稍有自專 一聽大國之裁制焉)". 당시 추세를 일반화한 결과, 태서(서양)의 속국은 '자주지권'이 부재한 것, 즉 주권이 몰수되는 것으로 상상된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서양의 '자주(自主)'가 중국과 달리 모든 일에 대해 타국의 절제를 받지 않는 국가로 일반화되는 이항대립적 이해로 이어졌다. "중국이 속방을 대하는 것은 내정과 외교는 그 자주로 말미암도록 한다. 오직 늠봉(廩俸)을 세급(歲給)할 뿐인데, 태서(서양)에는 없는 것으로 내정과 외교를 자주해서는 안 되고 재부(財賦)를 징수하여 상국에 모두 보내니, 이름은 나라와 군주라 일컬어도 심하면 수부(守府)에 이른다(中國之待屬邦 內政外交由其自主 泰西無之 惟歲給廩俸而已 内政外交不得自主 征收財賦歸諸上國 名曰國君 甚於守府)"는 원세개의 언설은 이러한 시각을 잘 보여준다. 물론 북양대신 이홍장과 청 조정은 조선과 청의 종속 관계를 중국의 이미지 속 유럽식 종속 관계와 동일하게 재편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한계를 분명히 인지했다.

    청조는 조선을 '기미(羈縻)'라는 명분으로 서양의 방식들을 변용해서 조선에 대해 정치적·경제적 종속성을 강화하였다. (정치경제는 불가분적 관계에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조약을 통한 '속방' 및 '번방(藩邦)'의 명문화(조중장정, 속방조회), 청조와 조선을 '중동(中東)' 대신 '천조'와 '상국'으로 명시할 것(봉천장정), 원세개의 월권, 대원군의 압송(설복성은 상황에 따라 처형까지 제안했다)과 송환 등이 있으며, 경제적으로는 해관 인사권의 장악이나 제3국 차관의 통제 그리고 은본위제 철회 등이 있다. 이러한 조치들은, 한편으로는 1884년 청불전쟁의 패전 책임을 묻는 갑신역추(甲申易樞)로 총리아문대신이 물갈이 되면서 새로 임면된 순친왕(醇親王) 혁현(奕譞, i huwan) 등이 잠재적으로 군현이나 감국(監國)을 염두한 데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순친왕과 이홍장 등은 1890년 시점에서 이미 군비 강화 정도를 제외하면 현실적으로 강구할 수 있는 대책이 없다고 토로했다. 즉, 논리논세(論理論勢)에 따져보면 중국은 명분없이 천하의 군대를 일으켜 조선을 무너뜨릴 수도, 영국과 프랑스가 미얀마와 베트남을 관리할 역량을 갖추었듯이 조선을 끝까지 관리할 역량도, 애초에 조선을 없앨 힘 조차도 없었기 때문에 현상 유지 외에 실질적인 대안은 없었다. 그들에게 현상 유지란, 탄력적이고 가변적인 전통적인 종속 관계를 국제법적 체계의 번속(藩屬, Vassal State)으로 재해석해 제국의 종주권과 조선의 애매모호한 주권을 모두 유지하는 정도였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베트남, 인도[印度], 이집트[埃及] 등 서국(西國)의 보호지방(保護之邦, States under Protectorate, 泰西 保護國)과 달리 조선은 통서(統署)를 가지고 외국과 교섭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홍장이 상정한 것은 번속(藩屬, Vassal State)으로서의 반주지국(半主之國, Semi-Sovereign State)이었고, 총리아문은 "자주를 알고 속국이 아니라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면 또한 큰 지장은 없다(若但認自主未認非屬 尚不甚妨)"고 하였다. 마건충은 이것을 "자주의 명을 관용하면서, 실은 그 속방의 도리를 거듭 밝히도록 했다(寬假以自主之名 實申明其屬邦之義)"고 풀이했다.³

    그렇다면 조선인들은 어떠했을까? 《국제법의 기초와 전쟁법(Elements of International Law and Laws of Wars)》에 따르면, "명목상 속국 또는 봉건적 종속국을 인정하는 것이 반드시 속국의 주권을 손상시키지는 않는다. 국제법의 관점에서 그 위상은 다른 것들과의 이런 류의 관계로 인해 반드시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다. 법은 단순히 주권을 가리키는 명칭보다는 주권의 실상을 고려한다(nominal vassalage or feudal dependence ... necessarily impair the sovereignty of the vassal state. Its position in the eye of international law is not necessarily affected by its connections of this kind with others. The law regards the fact of sovereignty rather than the mere name by which it is designated)"고 하였다. 1882년 10월, 박영효는 일본에서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에게 청조의 전방위적인 간섭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면서 일본에 의뢰하여 '독립(獨立)'의 열망을 호소했다. 당년 12월에는 주일영국공사 파크스에게도 《속방조회》가 조선이 중국의 종속국(dependency)이나 내치와 외교는 완전히 독립(entirely independent)이라고 선언하는 것이었다고 보면서, 지금 중국은 조선의 군주권과 정부의 대내외적 주권을 모두 간섭하고 있다고 한탄했다. 박영효의 발언은 확실히 서구적 맥락에서의 '독립(Independence)'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파크스는 조선은 사람들이 원한다면 '독립'을 포기할 수 있는 개방적인 국가이며, 천진에서 체결된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이 조선국왕의 지위를 낮추고 있다고 답변했다.

    이듬해 김옥균도 파크스에게 대원군의 압송 등 제국의 간여가 국제법적으로 타당한지, 조영조약의 비준이 조선의 '독립'을 지켜줄 수 있는지 질의했다. 파크스는 입약권이 '독립'의 필수적인 조건이고, 《속방조회》의 선언에 따라 조선국왕에게 입약권이 있다고 보았지만, 서구 열강이 조선을 종속국이 아닌 독립국으로 간주할지 여부는 그 나라의 행동에 달려있는게 컸다. 김옥균과 박영효를 비롯한 개화당은 비밀외교 과정에서 '완전한 독립'을 위해서는 종속 관계의 타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닳았다. 당년 4월 말, 김옥균은 영국의 아스톤(William George Aston)에게 "조선의 진일보하는 노력에 있어 일본의 발자취를 따를 것이고, 과거 수백 년 전부터 제자리걸음 하고있는, 오히려 퇴행적으로 보이는 중국의 영도를 버리고 유럽을 그 모델로 채택할 것(that Corea, in her future efforts after progress, will follow in the footsteps of Japan, and adopt Europe as her model, abandoning the guidance of China, under which her condition for several hundred years past has been stationary, or, rather, retrograde)"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들은 1884년 말, 스스로 종속국 노릇하는 데서 '독전자주지국(獨全自主之國, Independent Sovereign State)'의 체면을 세워 불가불 자수자강(自修自强)해 정치를 개선하고자 했다. 그들은 갑신정변을 일으켜 '조공체계'[朝貢虛禮]의 폐지를 선언했다. 청군은 고종의 보호를 빌미로 갑신정변을 진압하였다.

    이후 조선에서는 직접적으로 청 종주권 하에서 '독립'하여 명실 공히 '자주지국'을 지향하는 운동은 사실상 벌어지지 않았다. 이듬해, 청 제국은 고종이 러시아의 피보호국화를 요청했다는 의혹(제1차 조러밀약)에 대응하여 원세개를 주찰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紮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로 파견했다. 연이어 제2차 조러밀약 의혹이 제기되자 원세개가 고종의 폐위나, 김윤식 및 흥선대원군에게 국정을 감독할 것을 제안할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는 조선의 대청 종속도가 심화되는 결과를 야기할 수 밖에 없었다. 민영익이 고종에게 원세개의 건의를 밀고하자, 고종은 청조의 입약권도로 보장된 외교권[通使之權]을 활용하고자 했다. '만국병립'의 시세, 즉 다자적 질서에서 열강과의 입약과 교섭은 청조의 전방위적인 간섭을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1887년, 조선 조정은 각국에 전권공사를 파견하고자 하였다. 당년 5월, 민영준을 판리공사(辨理公使, 3등 공사)로 삼아 일본으로 파견하고 그것을 한참 뒤에 청조와 열강에 통보하여 청조의 반응을 떠보았다. 상주사절은 지금까지의 '조공책봉관계'에는 부재했던 서구의 외교 방식이었던 바, 조선과 청조는 각자 미지의 영역에 대해 자신들이 유리한 방향대로 조율에 들어갔던 것이다.

    판리공사의 파견을 통해 (결과적으로) 청조의 소극성이 확인되자, 조선은 주미·주유럽 전권공사를 파견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때 주조선일본공사와 영국과 독일의 총영사가 원세개를 접견하여 공사의 파견에 있어 '전권(全權)'은 안 된다고 조언했다. 영국과 독일 총영사는 전권공사의 파견은 곧 청조가 조선의 대외 교섭에 상관하지 않는 것으로, "서인들이 중국의 속국이 아니라고 말할 것(西人卽謂非華屬)"이라고 경고했다. 원세개는 이미 주일판리대신의 일행이 천조를 배반하고 중국과 평행[敵體]하고자 하는 개화론자들임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 사절이 각국에 파견됐을 때 중국 사절과의 만남에서 양자간 위계를 분명하게 설정하고자 하였으나, 영국과 독일 총영사에게 그것은 '방관'에 불과했다. 원세개의 추동에 의해 청조는 고종이 북양대신과의 사전적인 논의 없이 전권공사를 무리하게 파견한 것을 힐문하였다. 이에 조선 의정부는 사절 파견은 늘 이후에 자문을 보내어 통보하였고, 주일판리대신의 주재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진행된 것이라고 항변했다. 청 조정은 황제의 윤허를 받고 각국에 사절을 파견하는게 '속방체제'에 부합한다는 취지의 유지를 내리는 한편, 이홍장은 총리아문에 조선이 전권공사를 3등 공사로 격하하도록 할 것을 주문했다. 사실 조선 조정이 외교권을 활용하여 '균세'를 도모한 것은 맞았지만, 그들은 '전권'을 두등공사(頭等公使, 1등 공사)가 아니라 2등공사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종은 '전권' 상주사절의 파원을 번복하는 것은 "소방(小邦)의 치욕이고 또한 천조(天朝)의 근심이 될 것(小邦之辱 亦天朝之憂)"이라고 하면서, '전권'을 상주시켜 광서제의 수념지은(垂念之恩)에 보답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신속하게 출사대기시켰던 주미·주유럽 전권공사로 임명된 박정양과 조신희를 다시 한성으로 소환하고, 아울러 주일판리공사 민영준 등까지 귀국시킬 수 밖에 없었다.


    1890년 총리아문대신의 단체사진에서 장음환(張蔭桓)의 모습. 그는 1880년대에 미국, 스페인, 페루로 출사하여 화교 문제를 비롯한 외교적 현안을 처리하였으며, 1887년 조선의 대미사행 당시 '삼단' 중 제1단을 제안하고, 주스페인미국공사를 역임했었던 존 W. 포스터(John Watson Foster,1836-1917)의 조언에 따라 1888년 2월 24일, 뉴욕헤럴드에 박정양의 '삼단' 이행 사실 등을 게재하면서 청조의 '속국체제'를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출사미국대신(出使美國大臣) 장음환(張蔭桓)은 주미영국공사를 통해 과거 인도 제후[印度王子]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종주국인 영국 사절의 인솔 하에 미국 대통령을 예방한 사례를 접하고 그것을 서례(西例)의 '속방'으로 일반화한 뒤 조선 사절에게도 적용할 것을 제안했다. 이는 상술했듯이 청말 중국인들이, 당시 종속국들을 외교권을 제한하는 추세를 서양의 종속 관계로 일반화하고 조선과의 종속 관계와 가상적 등가관계를 설정한 데서 기인한 탓이었다. 총리아문과 광서제는 상주사절의 파견을 막을 수 없다고 하는 한편, 전권공사 파견에 대해서 어떠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대가로, 흠차대신이 조선 사신을 제3국 외무부로 인솔하고, 제3국 조회나 연회에서 조선 사신이 흠차대신의 뒤를 따르고, 제3국 대사와의 교섭 전에 흠차대신과 비밀히 논의할 것을 규정한 '영약삼단(另約三端)'을 관철했다. 청말 중국인의 이미지 속 서양의 종속 관계를 변용한 것이었다. 영국 및 러시아 외무부가 그들의 청국공사에게 서양의 예에는 제1단과 같은 규정이 없다는 의견을 표명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삼단'은 서양에게도 새로운 영역이었다. 1887년 12월 미국에 출사한 전권공사 박정양이 미국 대통령에게 국서를 봉정하였는데, 그 국서에서 청 황제의 연호 대신 '대조선 개국(大朝鮮 開國)' 연호를, 고종은 '짐(朕)'을 자칭했다. 박정양은 참찬 서수붕(徐壽朋)과의 필담에서는 제후의 도리[侯度]를 좆았으나, 고종의 개입과 알렌과의 모략 하에 미국과의 교섭에서는 제1단을 위반하고 그 직후 고종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다. 그런데 서수붕이 보기에, 어차피 긴요한 일을 사전에 비밀히 상의하는 제3단은 사실 그런 일이 일어나야 상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없었고, 공회에서 흠차대신의 뒤를 따르는 것은, 도착한 순서로써 순위를 삼는 것이므로 청국이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미 국무장관 토마스 F. 베이야드(Thomas Francis Bayard) 등은 원세개가 '전권'을 고치려는 시도에 반발하였지만, 어차피 총리아문은 어떠한 입장도 표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입장을 그대로 전달했으며, 베이야드 또한 제1단을 대신해 박정양을 만나기 전에 장음환과 회동함으로써 '속국체제'에 어긋나는 것을 모두 면하였다.

    박정양이 제1단을 위반한 직후, 고종은 '삼단'의 개정 교섭을 전개하였지만, 청 측은 이를 지속적으로 거부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원세개의 의심을 받은 고종은 박정양이 제1단을 위반한 것을 개인 행동으로 떠넘기기까지 했다. 결국 박정양은 소환되었고, 조신희는 원세개를 두려워하여 왕명도 없이 홍콩에서 중도 귀국했다. 청조는 박정양의 처벌과 O. N. 데니(Owen N. Deny)의 해임을 요구하는 등 인사권과 사법권에 간여했다. 데니는 1888년 《청한론(China and Korea)》을 출판하여 편의적으로 '진공국(Tributary State)'이 '자주 독립 국가'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결국 박정양은 솜방망이 처벌로 넘어갔으나 데니는 해임되어 귀국했다. 1889년 조선은 청국에게 '만국통사공례(萬國通使公例)'를 근거로 제1단의 철회를 요청하거나, 속국의 도리를 거론하며 '삼단' 개정을 통해 '자주지권'을 보전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홍장이 보기에, 조선이 각국과의 외교에서 '자주'를 참칭하는 것은 중국의 관용 덕인데, 지금 조선의 요구는 제3국에서 조선이 중국과 평행하려는 시도였다. 그는 어차피 '삼단'은 중국과 조선 사이의 규정으로 각국이 상관할 바도 아니고 이해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원세개는 고종의 요구가 "조선이 근래에 중국을 버리고 자주하기를 희망(韓近欲撤華自主)"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오스만 사절이 속국 불가리아 사신을 인솔하여 영국 군주를 예방하고, 나아가 외무부에 국서를 봉정할 때 접수가 거부된 전례가 없다고 반박했다. 결국 주미조선공사관은 유지되었지만 1891년, 뉴욕과 필라델피아의 영사관들은 모두 폐지되었고, 당년 3월 말에는 조선이 제1단의 삭제를 요청하면서 아예 '전권'을 취소하고 3등 공사로 고치겠다고 애걸했다.

    1893년 이승수와 김사철이 각각 주미·주일 변리공사(辨理公使)로 파견되었으나, 과거 민영준과 마찬가지로 3등 공사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어느정도 구조적 지배를 관철한 이홍장은 '삼단'이 사실상 "서례에서는 실행하기 어려운 것이므로 수시로 융통할 수 있다고(西例原所难行 随时通融)"고 보았다. 즉, 제1단을 강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1891년 말부터 1892년 초엽, 고종은 김가진을 주일판리대신으로, 이후에는 권재형을 대리공사로 하여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과 비밀리에 우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이 과정에서 주일 오스트리아 공사 비겔레벤 남작(Barron Roger de Biegeleben)이 제국 대표로서 조선의 권리 유지와 이익에 대해서만 일방적으로 다루는 《속방조회》를 오스트리아 황제의 명의로 접수할 수 없다고 거부하였으나, 어쨌든 청국은 조선의 진의를 의심하고 조회의 형식 변경을 불허하였고, 이에 조선 측이 "조회를 했다"고 청국에 보고하였다. 그 결과 조회를 정부 대 정부 간의 공문으로 대체하여 기존에 각국에 발송한 《속방조회》를 재검토하는 일은 없었으므로 사태는 미봉되었다.

    III. 나가며


    지금까지 근대 초기, 동남아시아 및 동아시아에서 '독립(Independence)' 개념이 유입되는 과정에서 시암과 중국 등이 일본 및 서양과의 교섭에서 어떻게 충돌하고 조화했는지 살펴보았다. 베스트 팔렌 조약 이래 유럽인들은 '주권평등'의 형식논리로 각국과 외교를 행했다. 종속 관계나 위계 질서는 전지구적 현상이었지만, 유럽의 형식논리에서는 이 종속 관계가 미약할 경우 온전한 자주국 내지 독립국으로 해석 내지 격상할 여지가 있었다. 그리고 서구 열강은 '주권평등'과 '독립'의 개념을 식민제국 팽창의 도구로 활용했다. 가령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의 '납공(Tribute)' 행위를 복종이 아니라 명목상에 그치는 것으로 전유하고자 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핵심적으로, 역사적 맥락에서 서양인들의 시비는 '시비'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뚜렷한 목적을 가진 타자의 시선을 본질화하는 것이 얼마나 타당하다고 봐야할까? 시암과 청 제국의 종속 관계는 열강에 의해 명백히 파괴되거나, 스스로 '복합 주권적(Complex Sovereignty)' 관계를 '합병'으로 재편하는 과정에 돌입하지 않는 이상 부정되지 않았다. 현재 한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이른바 '속국자주론'은 1860년대 벨로네에 의해 제기되고 청 조정이 국제법적 프레임에 끌려다니면서 내세운 언설을 탈맥락화하고 있는 것이다. 당대적 맥락에서 "속국이나 내치와 외교는 자주"한다는 언설은 종속 관계가 허명이라는 뜻도, 그것이 그 관계의 본질이나 원칙이라는 것도 아니었다. 열강과 속국 사이의 마찰과 개입을 최대한 예방하려는 청조의 행보가 위기라면 위기겠지만, 공식적으로 상국 청조와 속국 조선이라는 종속 관계를 부인할 의사 따위는 없었다.

    시암은 1892년부터 1904년까지 이른바 '붕아 마스' 의례를 철폐하는 한편, 서구 열강과 변경지대 및 군소국가들을 분할하고 점진적으로 '합병'했다. 그 연장선에서 20세기 전반 '속국(ประเทศราช)'이라는 개념은 '식민지(อาณานิคม)'라는 새로운 단어로 대체되었다. 청조에서도 국제법 서적들이 한역되는 과정에서 유사한 현상이 일어났다. 영어와 독일어를 한어로 번역하면서 언어적 '중간지대'가 형성돼 서로 다른 개념들의 차이를 약화시키는 '가상적 동의어'가 출현했다. '식민지', '종속국', '연방국', '피보호국' 등의 개념 사이의 경계가 약화된 것이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서양의 추세는, 시암이 편승했듯이 '독립'이나 '합병'으로 귀결되는 과도기였다. 청 지식인들의 이미지 속에서 가상적 등가 관계로 설정된 식민 모국과 식민지, 종주국과 종속국, 연방 정부와 영방국, 능보호국과 피보호국의 질서는 모두 실질적으로 '합병'이나 그에 준하는 '단일 주권적' 관계였다. 그들이 상상한 유럽식 종속 관계는 탄력적이고 포괄적인 '복합 주권적' 관계를 맺는 중국의 종속 관계와 다른 것이었다. 물론 파크스가 김옥균에게 말했듯이, 사실 국제법에서의 종속 관계도 다양한 위계 질서를 포괄하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1880~90년대, 서구의 완전한 '자주·독립'의 개념을 보다 명확하게 체득한 그들에게 '복합 주권적' 관계는 이제 서양인들과 마찬가지로 탄력적이고 포괄적인 데 그치지 않고, 취약한 개념으로 인식되었다. 조야에서는 이제 자신들이 상상한 유럽의 종속 관계와 다른 청조의 종속 관계가 '독립'에 다름 없다거나, 유행에 따라 언제든지 완전한 '자주·독립'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점을 환기하며 조정에 유럽의 종속 관계를 모방하자고 건의했다. 다만 청 조정과 북양대신 등은 그 영향을 받아 근대적 방식들을 활용해 종주권을 강화하면서도, '종주-속국 관계(Suzerain-Vassal relation)'라는 '복합 주권적' 내지 '반주권적' 관계를 유지하여 청일전쟁 직전까지 청 제국의 종주권 하에 조선의 자치를 모두 보전했다.

    한편 청 제국에 대한 종속성이 심화되자, 개화당은 이에 불만을 품고 비밀외교를 전개했다. 과거 고려와 조선의 군주들은 거란(요)에 승전하여 친조를 면제받거나, 몽골(원)에 칭신하여 친조하거나, 명 제국에 '지성사대'함으로써 종주권 아래에서 정치적 자율성을 조율하고 타협했다. '상국(대국)'은 하나여도 '소방'에는 층위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19세기 후반 열강의 도래로 촉발된 '만국병립'의 시세에서는 꼭 그럴 필요가 없었다. 서양인들로부터 학습한 '독립'이라는 개념은 이제 종주국에 불만이 있다면 표출될 수 있었다. 개화당은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천여 년 간 이어온 '조공책봉관계'를 폐지해 종주권으로부터 '자주·독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의 지향은 실현 가능성만 있었을 뿐, 차관 교섭의 실패와 내부 권력의 이반 그리고 청군의 진압으로 3일만에 몰락했다. 게다가 이듬해에 청조가 조중장정의 상무위원 자격으로 원세개를 총영사급으로 파원하면서 청일전쟁 직전까지 조선의 대내외적 종속성은 보다 더 심화되었다. 그러나 조선에서 종주권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운동은 더이상 전개되지 않았다. 단지 늘 그래왔듯이 종주권 하에서 자주성을 세부적으로 조정하고 타협했을 뿐이다. 김윤식을 비롯한 조선의 식자층은 '자주·독립[自尊各立]'의 개념을 체득했으나, 고종은 '박정양 사건' 및 오스트리아와의 비밀 교섭을 기도하거나, 외국 공관에게 '폐하(陛下)'를 자칭하는 등 소극적으로 '자주·독립'을 지향했을지언정 그 지향은 의지와 별개로 실재 형적(形迹)이 없이 좌절됐을 뿐이다. 양자의 '반주권적' 관계는 수백여 년 전부터 문제이자 해결, 억압이자 대안, 강요된 의무이자 생존전략이었다. 청 조정 뿐만 아니라 조선 조정도 이 애매모호함을 극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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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885년 4월 15일, 영국이 러시아를 견제하고 동아시아 패권 질서에 개입하기 위해 거문도를 점령하였다. 사실 영국 외무부는 이미 주영청국공사 증기택(曽紀澤)과 사전에 속방 지위의 공인과 거문도 점령을 거래했다. 거문도 점령 직후 영국은 주영청국공사와 주영일본공사에게 이 사실을 통지하였을 뿐, 청의 종속국인 조선에게는 한달이 지나서야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 김윤식은 미국, 독일, 일본에게 거중조정을 요청하고 영국의 점령이 만국공법을 위배한 것이라고 호소했다. 이에 영국은 조선과 직접 교섭을 시도하였지만 조선은 즉각 철군을 요구했다. 사실 청 제국과 일본은 영국군의 거문도 점령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북양대신 이홍장은 거문도 점령에 반대 의사를 표명할 정도였다. 당년 5월, 주청영국공사 오코너(N. R. O’Conor)의 제안에 따라 영국은 청 제국에 의전해서 조선을 압박해 거문도 철군 요구를 차단하고자 했다. 7월, 영국 외무장관 솔즈베리(Salisbury)는 거문도 철수 후 러시아의 남진을 청 제국이 저지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두달 뒤 아프가니스탄에서 영국과 러시아의 충돌이 봉합되자, 이홍장은 영국의 철군을 제안했다. 1886년 4월, 영국 외무부는 청국에 철군 조건으로, 각국이 거문도를 비롯한 조선 영토를 잠식하지 못하도록 할 것을 통고했다. 원세개의 고종 폐위 논의 등에 조선은 영국에도 상호 상주사절을 파견할 것을 요청했으나, 영국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원세개의 유임을 환영하는 등 긍정적인 관계를 구축했다. 영국은 사실상 청조의 외교적 종주권도 인정하는 행보였다. 그 결과 청 조정은 이홍장으로 하여금 당년 9월부터 주청 러시아 대리공사 라디젠스키(Николай Фёдорович Ладыженский)와 회담을 진행하였다. 당시 총리아문은 종주권을 주권으로 재편, 즉 조선을 '병합'하고자 하는 여지를 남겨뒀기 때문에 종주권 명문화 및 현상 유지 문구의 삭제를 주장했으나, 러시아는 그것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회담은 결렬되었다. 물론 이홍장은 구두 협의를 통해 러시아가 종주권을 묵인하는 동시에 조선의 주권을 애매모호한 상태로 놔두는 현상 유지를 약속받음으로써 총리아문의 잠재적 강경론자들을 억제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총리아문은 거문도 철수를 요구하여 영국의 동의를 받아냈다.

    2). 일본 측은 '독립'을 의뢰하는 개화당에 열망을 완곡하게 거절했다. 이노우에 가오루는 '독립'이 인정되는 것은 오히려 득책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갑신정변 이후인 1885년 2월 8일 에노모토 아케아키(榎本武揚)에게 다음과 같은 훈령을 내리면서, 일본이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지만 청국이 '상국권(上國權, Suzerainity)'을 보유하고자 고집하는 이상 공동 보호는 도저히 불가하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당년 5월 에노모토 아케아키는 조선이 자립의 실(自立ノ實)이 없기 때문에 도저히 스위스 및 벨기에와 같은 영구중립[終古中立]이 아니라 공동 보호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두달 뒤 이노우에는 에노모토로 하여금 이홍장에게 〈조선외무판법(朝鮮外務辦法)〉을 건의해서 공동 보호를 제안했다. 일본이 전망한대로 청조가 종주권을 고수하는 이상 조선을 독립국으로 보고자 하는 일본의 '지향'과 공동 보호의 제안은 실현되지 못했다. 다만 이 건의의 여섯 번째 조항은 서울에 주재하는 좌탐국정대원(坐探國政大員)을 현재 주찰 중인 진수당보다 유능한 인물을 파견하자는 것이었다. 천진조약 결과 청조와 일본이 조선에 대해 동등한 권리를 행사하고 있었지만, 이노우에가 우려한대로 '독립국'이 아닌 '속방(屬邦)'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청 제국은 이를 기회로 삼아 전선을 가설하여 동삼성 전신망에 종속시키고, 북양함대나 윤선 운항에 대한 각종 특권을 확보하였으며 나아가 한러밀약 직후에는 진수당을 소환하고 원세개를 파원했다.

    3). 청 제국이 전통적인 '조공책봉관계'를 통해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를 서양인들에게 관철시키려는 시도에 관해서는 필자의 다른 글 참조. https://chinua.tistory.com/m/15

     

    청말 대조선 정책은 전통적인가 근대적인가?

    1880년대부터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일본이 조선의 "완전무결한 독립자주(完全無缺之獨立自主)"를 선언하기까지 청 제국의 대조선 정책에 대해 한국학계와 중국학계의 판이한 입장차가 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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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19세기 후반 주청 대리공사 홀콤(Chester Holcombe)과 주조선공사 허드(Augustine Heard) 그리고 미국 국무성에서 동아시아 정책을 담당했던 윌리엄 록힐(William W. Rockhill) 등도 박영효와 동일하게 《속방조회》를 내치와 정교 그리고 수호의 '완전한 자주(full sovereignty)' 혹은 '절대적 독립(entirely independent)'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조미수호통상조약과 조중장정 그리고 《속방조회》 등이 이루어지는 시점에서 북양대신 이홍장은 태서(서양)의 통례에 속국은 정치는 온전히 자주(自主) 할 수 없는 것으로 곧 반주지국(半主之國)이 입약이 가능하고 단지 동맹만 불가하다는 사실과 함께 상무위원 등을 조선에 파원하여 통상을 주지하고자 했다. 그는 대신을 파원해서 조선 정부와 의논하고 일체를 정리함으로써 조선을 보호한다면 서양 속국의 예에 상부할 수 있다고 전망한 것이다. 19세기, 국제법의 한역 과정에서, 세부적으로 의미가 겹치는 '독립(Independent)', '자주(Sovereignty)', '자치(Autonomous)' 등의 개념이 아예 구분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동시에 모두 '자주(自主)'로 번역되는 가상적 등가성을 형성하고 있었다. 몇몇 서양인들이《속방조회》를 오독하거나, 컨텍스트를 두고 서로 다른 편의적 이해를 보인 것은 당시 국제적 추세와 번역의 가상적 등가성 등이 복합적으로 얽힌 결과였다. 따라서 《속방조회》의 '자주'는 문맥을 보아야 한다. 마건충은 조회 원고에 대해 "자주의 명을 관용하면서 실은 그 속방의 도리를 거듭 밝히도록 했다"고 하였다. 결정적으로 조미조약 교섭 과정에서 이홍장은 총리아문에 "반주지국은 조약 체결에 관해 원래 자주할 수 있습니다. 지금 조선의 초안 제1조에서는 '조선은 중국의 속방으로, 내정과 외교는 줄곧 자주할 수 있었다'고 싣고 있습니다. 따라서 미국의 입장에서는 본디 조선과 조약을 맺을 수 있지만, 조선이 중국의 속방이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는 없습니다. 조선 입장에서는 조약을 논의하는 문제에 대해 반드시 중국 대황제의 지의를 받들어야 하며, 미국은 또한 이에 대해 참견할 필요가 없습니다(半主之國 於訂約一事 原可自主 今按朝鮮原擬第一款 朝鮮係中國屬邦 而內政外交向來得以自主 是在美國固可與朝鮮訂約 不必認朝鮮爲中國屬邦 在朝鮮於議約一事 須奉中國大皇帝旨意 美國亦不必過問)"라고 하였다. 슈펠트 또한 조선을 '반속국(semi-dependant state)'으로 상정하고 "조선국왕이 조언을 받아들여 그의 종주인 중국 황제의 조언에 의해 지배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It is eminently proper that the King of Corea should take the advice and be governed by the counsel of his suzerain the Emperor of China)"라고 하였다. 이홍장과 슈펠트에 따르면 미국은 조선과 어떠한 정치적 동맹도 체결할 권한이 없었지만, 《속방조회》에 따라 조선이 독립적인 입약권을 가지기 때문에 종주국과 별개로 우호통상조약을 체결할 수는 있었다. 1887년 '영약삼단(另約三端)' 문제가 벌어졌을 때도, 미국은 조미조약이 침해되지 않는 선에서 공사 파견 문제에 유일하게 개입하였고 박정양이 부임하자 더이상 청국이 조선에 관철하고자 한 '속국체제'에 관여하지 않았다.

    5). 1890년 조대비 조문 당시 영칙 의례에 대해 미국 공사 허드는 이러한 의례가 단지 '오리엔탈(Oriental)' 간의 행위에 불과하다고 일축하는 속임수로 전통적인 의례를 무의미한 일로 치부하고자 했다. 그러나 막상 본국에 대해 보고하면서는, 청조가 조선을 그들의 '종속국(dependent)' 또는 '납공국(tributary)'으로 선언한 그 자체에 대해서는 함구하거나, 조선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해서 궁극적으로 "그들의 과거의 사적 관계를 유지하지만 그 정부의 내정에서 조약에 따라 독립적(preserving her ancient, private relations, but independent as by Treaty in her Governmental administration)"인 '중국의 보호 진영(protecting wing of China)'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전망했다.

    6). 물론 조선 측이라고 아예 반기를 들려는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884년 후반, 고종은 외교 고문 뮐렌도르프로 하여금 나가사키 주재 러시아 영사에게 조선 제물포로 수 척의 러시아 전함을, 서울에 200명의 해병을 파병하여 조선을 '러시아의 보호국(протекторат России)'으로 설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것은 청국주재 러시아 육군 대령 슈네우르가 러시아의 단독 보호를 받으면 조선도 불가리아처럼 자립하고 자주권을 스스로 지킬 수 있도록 될 수 있다는 언설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고종이 생각한 '피보호국'이 무엇이었는지 불분명하다. 어차피 러시아 제국은 조선의 단독 보호를 염두하지도 않았지만, 고종의 단독 보호 요청은 고종의 생각과 별개로 사실상 외교 주권의 제한 및 러군의 진주 등을 의미하기 때문에 청 제국의 종주권 관철 시도와 질적으로 다른 위험한 착각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韓東勳(2021). "19세기 후반 조선과 러시아의 상호인식과 외교정책". 高麗大學校 大學院 博士學位論文.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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